“이제 한국 기술 기업에 중요한 것은 글로벌 시장 진출 여부가 아니라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진출하느냐입니다.”
플뢰르 펠르랭(Fleur Pellerin) 코렐리아 캐피탈(Korelya Capital) 대표가 한국 기술 기업의 글로벌 스케일업을 위한 파트너로 유럽을 꼽았다. 미국과 중국 중심의 시장 진출 전략에서 벗어나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서로의 산업적 강점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펠르랭 대표는 19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 서울에서 열린 2026 서울투자서밋(Seoul Innovest Summit 2026) 특별 강연에서 한국과 유럽이 지금 협력해야 하는 이유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공통된 지정학적 위험, 양측 간 전략적 충돌이 없다는 점, 유럽의 한국 기술에 대한 수요, 미·중을 넘어선 새로운 시장의 필요성이다.

첫 번째는 미국 기술과 중국 공급망에 대한 의존이다. 펠르랭 대표는 세계 경제가 블록화되면서 공급망이 시장 논리뿐 아니라 정부 정책과 국가 안보에 따라 재편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국과 유럽 모두 미국 기술과 중국 공급망에 대한 의존에서 자유롭지 않은 만큼 서로 협력해 위험을 분산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미·중 양강 구도에서 한국과 유럽이 공통된 이해관계를 가진 중견 세력이라는 점에 주목, 기술과 공급망을 둘러싼 지정학적 긴장이 커질수록 양측이 신뢰할 수 있는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두 번째는 양측 사이에 전략적 충돌이 없다는 점이다. 펠르랭 대표는 한국과 유럽 사이에 영토 분쟁이나 전략적 갈등이 없으며, 자유무역협정(FTA)도 발효돼 있다는 점을 협력의 기반으로 꼽았다. 공통된 위험에 노출돼 있으면서도 직접적인 전략적 경쟁 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는 점에서 장기적인 협력을 추진할 여지가 크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유럽이 한국 기업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유럽은 배터리와 반도체, 사이버 보안, 방산 등 전략 산업에서 신뢰할 수 있는 공급업체를 찾고 있다. 한국 기업에는 유럽의 공급망 재편이 새로운 진출 기회가 될 수 있다. 산업 역량도 서로 보완할 수 있다. 유럽은 반도체 장비와 지식재산권(IP), 첨단 AI 연구, 산업 규제 체계와 장기 투자 자본에 강점이 있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와 고대역폭메모리(HBM), 로봇, 제조 데이터, 배터리와 에너지 하드웨어, 대규모 생산 역량을 갖추고 있다.
펠르랭 대표는 특히 AI 경쟁이 소프트웨어를 넘어 공장과 전력망, 배터리, 선박 등 실제 산업 현장으로 확장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피지컬 AI가 발전하려면 AI 기술뿐 아니라 로봇과 제조 데이터, 이를 실제 생산 공정에 적용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한데 한국의 제조 기반과 유럽의 산업 기술 및 연구 역량을 결합하면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협력 가능성은 반도체와 피지컬 AI을 넘어 유럽의 에너지 수요와 탄소중립 정책은 한국 배터리·수소 기업에 기회가 될 수 있다. 유럽이 방위력 강화에 나선 가운데 한국 방산 기업도 진출 기회를 모색할 수 있다. 다만 방산 분야에서는 완제품 수출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유럽 현지 기업과 공동 생산 체계를 구축하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짚었다.
마지막은 미·중을 넘어선 새로운 시장의 필요성이다. 펠르랭 대표는 “한국 기업이 미국과 중국에 집중된 글로벌 진출 전략에서 벗어나 제3의 성장 축을 확보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유럽은 4억5000만명의 소비자를 보유한 단일 시장이며 공통된 규제 체계와 장기 자본을 갖추고 있어 한국 기업이 새로운 고객과 사업 기회를 확보할 수 있는 시장이라는 의미다.
펠르랭 대표는 한국 AI 반도체 기업 리벨리온(Rebellions)을 우수 진출 사례로 소개했다. 코렐리아 캐피탈은 리벨리온을 유럽의 슈퍼컴퓨팅 인프라와 AI 기업, 유럽 공공투자기관 등에 연결해 현지 사업 기회를 모색하도록 지원했다. 한국의 반도체 기술과 유럽의 AI 모델 및 컴퓨팅 인프라를 연결해 사업 확장의 발판을 마련하는 방식이다.
협력 범위는 기술을 넘어 소비재와 콘텐츠로도 넓어지고 있다. K-뷰티가 유럽 시장에서 성장하는 가운데 프랑스 브랜드 역시 아시아에서 높은 인지도를 보유하고 있어 양방향 진출 기회가 있다는 설명이다. 한국의 콘텐츠 산업과 프랑스의 창작물 금융 지원 체계를 결합하는 방안도 협력 분야로 제시했다.
펠르랭 대표가 이끄는 코렐리아 캐피탈은 2016년 유럽과 아시아의 기술 기업이 서로의 시장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설립돼 자금 공급에 그치지 않고 상업적 파트너십과 합작법인(JV), 공동 투자, 기술 협력을 연결하고 있다.

한편 서울투자진흥재단이 주최한 이번 행사는 11월 19일부터 20일까지 서울 여의도 콘래드 서울에서 열렸다. 이번 행사에는 글로벌 투자자 등 약 100명의 투자자와 전체 약 300명이 참석했으며 AI·로봇·반도체, 바이오·헬스케어, 라이프스타일, 딥테크, 핀테크 분야의 약 45개 기업이 투자자를 대상으로 영어로 기업설명회(IR)를 진행했으며 투자자와 기업 간 일대일 미팅도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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