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캠프 이제 잘 안 가죠.”
스타트업 대표에게서 나온 말이었다. 투자사 관계자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이유를 묻자 돌아온 답은 하나였다. 예전의 디캠프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
지난 7월 20일 이사회에서 사표가 최종 수리되며 디캠프(은행권청년창업재단) 박영훈 대표가 물러났다. 임기를 8개월 남긴 시점이었다. 설립 14년 만에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내부 감사와 고용노동부 진정, 금융위원회 조사까지 이어진 끝에 나온 결론이다. 그가 물러난 뒤 디캠프를 거쳐 갔거나 여전히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에게 지난 2년을 물었다. 반응은 다양했지만 예상된 결과였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일치했다. 초기 스타트업을 가장 먼저 찾아가던 조직이 어느새 선별 투자를 우선하는 기관으로 바뀌면서 디캠프만의 정체성이 희미해졌다는 것이다.
디캠프는 2012년 신한은행, KB국민은행, 산업은행, IBK기업은행 등 19개 금융기관이 출연해 설립된 국내 최대 규모 창업 지원 재단이다. 스타트업 초기 지원의 상징적인 기관이자 은행권이 사회공헌 차원에서 만든 공익법인으로 민간 벤처캐피털처럼 투자 수익을 내는 것이 아니라 초기 창업팀을 발굴하고 창업 생태계를 키우는 게 존재 이유였다.
변화는 2024년 4월 GS 출신 박영훈 대표가 취임하며 시작됐다. 그는 초기 창업팀 발굴 위주였던 기존 지원 방향을 소수 유망 기업에 집중 투자하는 배치(Batch) 프로그램과 프리시리즈A~시리즈A 단계 중심인 ‘디캠프 2.0’으로 재편했다. 내부에서 투트랙 운영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반영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기존에 운영되던 프로그램 다수가 축소되거나 사라졌고 협력 파트너에게 열려 있던 공간에도 제한이 생기며 디캠프를 찾던 투자자와 생태계 구성원 발길도 끊겼다.

이후 조직 안팎의 갈등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저성과자 관리 프로그램(PIP) 도입 논란, 운전기사, 비서 인건비 신설과 잦은 해외 출장 등을 둘러싼 예산 집행 논란, 여성 직원 대상 성희롱 제보가 이어졌고 지난 4월 디캠프 설립 이후 처음으로 노동조합이 출범했다. 고용노동부 진정과 금융위원회 조사도 뒤따랐다. 결국 박 대표는 지난 10일 사임 의사를 밝혔고 이사회는 20일 징계 없이 사표를 수리했다. 노조와 일부 직원 사이에서는 징계를 피하기 위한 선제적 사임이라는 해석이 나왔고 사임 시점에도 별도 사과는 없었다.
박 대표 취임 전까지 디캠프가 쌓아온 건 적지 않았다. 매달 열리던 디데이(d.day)는 창업 초기 기업이 투자자와 전문가 앞에서 검증받는 데뷔 무대로 11년 넘게 이어진 간판 프로그램이었다. 선정 기업은 최대 3억원 투자와 보육시설 입주, 멘토링, 네트워크, 채용, 홍보까지 폭넓은 지원을 받았고 서울과 부산, 대구, 제주는 물론 해외에서도 열리며 전국구 초기 스타트업의 등용문 역할을 했다. 선릉 디캠프와 공덕 프론트원은 이렇게 선정된 창업팀들이 실제로 입주해 부대끼며 성장하는 커뮤니티 공간으로서 디캠프의 정체성을 상징했다.
이나리 초대 센터장이 센터를 개관하고 입주 기업을 유치하며 토대를 놓은 뒤 김광현 센터장이 직접 투자와 디데이, 오피스아워 등 주요 기능을 공식화했고 김홍일 센터장은 프론트원으로 공간을 확대하고 출연금을 3,450억원까지 끌어올리며 장기 생존 기반을 마련했다. 김영덕 센터장은 커뮤니티 활동과 지역·글로벌 브랜딩에 강점을 보였다.

센터장이 바뀔때마다 방점을 둔 프로젝트는 달랐지만 방향은 하나였다. 초기 스타트업 성장 지원이다. 이렇게 쌓아온 것들이 지난 2년 사이 어떻게 됐는지 디캠프를 거쳐 갔거나 여전히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에게 물었다. 가장 먼저 되돌아온 답은 ‘다 없어졌잖아요’였다.
디캠프 초기 멤버이자 현재는 스타트업 C레벨인 전 직원은 “디캠프로부터 시드 투자를 받은 이후 투자 기조가 급격히 바뀌면서 도움이 절실했던 단계에서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고 전했다. 프론트원에 입주하고 싶었지만 초기 스타트업 지원 트랙이 사라졌고 정작 기조를 바꿔 투자한 곳들은 규모가 커서 입주 니즈가 없다 보니 프론트원 자리가 오히려 비어가는 역설적인 상황도 벌어졌다는 설명이다. 자신이 근무할 때는 성과보다 생태계 발전을 위해 일한다는 보람이 컸는데 성과제 도입 이후 그런 게 무너진 것 같아 안타깝다고도 덧붙였다.
박 대표가 시작한 배치 지원을 받은 한 대표 역시 비슷한 문제의식을 내비쳤다. 사무공간이나 일부 프로그램은 실제 도움이 됐지만 예전 같은 ‘스타트업의 친구’라는 느낌은 약해졌다는 것이다. 네트워킹과 투자자 연결, 창업자 간 교류 같은 생태계 기능보다 특정 프로그램 운영 중심으로 바뀌면서 디캠프만의 강점이 흐려졌고 적극적으로 교류하던 투자팀 직원들도 모두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대표 개인보다 디캠프라는 조직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며 “원래 초기 창업자가 가장 힘들 때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주던 조직이 최근 검증된 기업 지원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초기 창업자가 체감하는 존재감이 줄었다”고 지적했다. 투자기관이 아니라 창업 생태계 허브라는 원래의 강점을 다시 살렸으면 한다는 바람이었다.
2015년 디데이에 선정되고 10년 넘게 디캠프를 지켜본 한 대표는 초기 스타트업에게 디캠프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짚었다. 그는 “재단이라서 좀 대충 할 수도 있는데 도움을 요청하면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자세가 항상 있었다”며 “주니어부터 리더십 레벨까지 창업자들을 존중하고 문제 해결이나 도움 요청에 ‘안 된다’는 게 없이 어떻게든 되게 해주려는 태도가 컸다”고 말했다. 사업개발과 금융 상담, 후속 투자 유치, 법률, 노무, 글로벌 진출, 채용까지 친정처럼 챙겨주던 프로그램들을 그때그때 유용하게 활용했다는 것이다. 현재는 대부분의 사업이 배치 선정 기업들을 중심으로 집중 지원되고 있다.

초기 창업팀으로 디캠프 지원을 고려했던 한 스타트업 대표는 아예 지원 문턱에서 걸린 사례였다. 그는 “최근 디캠프가 선발 기준으로 삼는 기업가치 수준이 100억원 정도로 지나치게 높아지면서 정작 자신 같은 초기 단계 기업의 지원 기회가 줄어드는 것이 아쉽다”고 전했다. 다른 민관 지원 프로그램에는 대부분 합격했지만 정작 디캠프에는 기업가치 이슈로 지원조차 하지 못했다며 도움은 오히려 초기 단계에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무엇이 사라졌는지를 넘어 왜 이렇게 됐는지를 짚는 목소리도 있었다. 디캠프를 외부에서 오래 지켜본 한 투자 기관 관계자는 “디캠프는 은행권 기부금으로 조성된 공공재적 성격의 재단으로 배치 5~10개의 특정 소수 기업에 지원을 집중하기보다는 다양한 스타트업에게 리소스와 기회를 균등하게 분배하는 것이 본래 목적인데 이 설립 취지가 크게 훼손된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모험자본 시장에는 이미 투자를 담당하는 조직이 넘쳐나는 만큼 디캠프는 단순 투자를 넘어 창업가정신을 함양하고 저변을 확대하는 본연의 역할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가 도전을 두려워하는 환경에서 안전망을 제공하고 창업 문화를 확산하는 대학 프로그램 등에 다시 집중해야 한다는 요청이었다.
익명의 전 센터장은 조직 문화가 망가진 것을 가장 안타까워했다. 그는 창업 생태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으로 자기 주도성을 꼽으며 디캠프 구성원들이 갖고 있던 그 자기 주도성이 최근 많이 사라진 것을 아쉬워했다. 예전에는 새로운 일을 추진할 때마다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를 두고 치열한 토론이 오갔는데 지금은 그런 문화 자체가 옅어졌다는 것이다. 대표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기만 하는 조직 문화에도 문제가 있다고 언급했다.
책임의 소재를 묻는 목소리는 박 대표 개인을 넘어 이사회로 향했다. 소셜미디어로 의견을 전한 한 투자사 대표는 상당 기간 대표의 전횡이 의심스러웠는데도 디캠프 이사회가 몰랐거나 방관했거나 덮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대표를 징계, 해임하지 않고 사표 수리 형태로 문제를 처리한 것에 대해서도 이사회가 사과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디캠프 노동조합 역시 28일 추가 성명을 통해 조직 차원의 요구 사항을 명확히 밝혔다. 노조는 이번 사안을 특정 개인의 문제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고 못박으며 낮은 조직 만족도와 불안정한 경영 방침, 직장 내 괴롭힘 및 성희롱 논란으로 조직 안팎의 신뢰가 크게 흔들렸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근로기준법과 남녀고용평등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에 근거해 사실관계의 투명한 공개, 괴롭힘·성희롱 사건에 대한 책임 있는 조치, 경영진의 인정과 사과 세 가지를 요구했다.

다음 리더십에 무엇이 필요하냐는 질문에는 이력보다 중요한 건 조직문화를 정상화하고 생태계 조성자로서의 본연의 가치를 되살릴 의지라는 데는 대체로 뜻이 모였지만 구체적인 조건을 두고는 온도차가 있었다. 한쪽에서는 지금까지 없었던 관료 출신이 필요하다고 봤다. 51 대 49로 갈리는 이해관계를 끊임없이 조율하며 컨센서스를 만들어가는 것이 본업인 만큼 그런 경험이 지금의 디캠프에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다만 여기에는 ‘괜찮은’ 관료여야 한다는 전제가 붙었다. 다른 쪽에서는 정반대로 금융이나 대기업 배경보다는 직접 창업하고 시련을 겪은 뒤 엑시트까지 경험해본 인물이 와야 한다고 봤다.
박 대표는 사임했지만 사태가 완전히 마무리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서류상 대표직을 유지한 채 실질 업무에서만 배제되는 상황으로 디캠프는 신임 대표가 정해지기 전까지 본부장 1인과 실장 3인이 업무를 나눠 맡는 임시 체제로 운영 중이다. 향후 누가 그 자리에 앉든 노동조합이 요구한 세 가지인 사실관계의 투명한 공개, 괴롭힘·성희롱 사건에 대한 책임 있는 조치, 경영진의 인정과 사과는 새 리더십이 시작하기 전에 매듭지어야 할 조건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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